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진주성 근처에 약 10만 명의 일본군이 집결하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휴전 협정이 다가오면서 긴장이 고조되었죠.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순신 장군과 황진장군이라는 두 인물이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이순신이 바다를 지휘했다면 황진은 육지를 맡아 진주성의 6만 서민을 지키겠다는 한결같은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한 그들의 역할, 희생 및 전략적 사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침입 때 김시민 장군은 일본군을 격퇴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패전에 대한 복수를 하고 이순신을 압박하기 위해 유명한 다이묘와 추가 일본군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진주의 수비군은 6,000명에 그쳤고, 명장 권율 장군과 의병장 곽재우는 일본군 10만명에 비해 진주성 6천 명은 그 숫자부터 전력차가 심해 싸움은 전략적으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서 참전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한 부분입니다. 전략적으로 승산이 없었다고 해도 황진장군이 진주성에서 항전할 때, 일본군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측면, 후면등 게릴라 전술로 치고 빠지면서 교란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왜 권율, 곽재우 장군은 후면 공격을 하지 않았을까요?
황진 장군의 희생
일본군 10만명이 진군하는 것을 알면서도 황진 장군은 자신의 작전지역이 아님에도 자진해서 진주성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의형인 김해 이종인 장군과 약속을 했고, 진주성의 6만 민중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황진의 성격과 행동은 탐사보도 전문기자 김동진의 역사소설 '임진 무쌍 황진'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관점을 엮어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고 당시의 사건을 엿볼 수 있는 빠른 속도의 내러티브를 제공합니다.
■ 황진 장군과 그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헌신
황진 장군이 불과 1년 만에 중위에서 중장으로 눈부신 승진을 한 것은 그의 리더십과 헌신의 증거입니다. 전라도와 진주성의 6만 민간인을 지키겠다는 그의 변함없는 신념은 군인으로서의 의지를 보여주었죠. "바다의 이순신, 육지의 황진"이라는 표현은 이 중요한 시기에 조선을 수호하는 각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 전략적 사고 및 준비
이순신 장군의 전략적 사고와 치밀한 준비는 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591년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 사령부에서 1년 동안 수군들을 열심히 훈련시켰습니다. 훈련은 학익진(해군 전술)과 함포사격전을 가능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판옥선을 90도 회전시켜 연속 함포발사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필수 기술이었습니다. 화살 사격 훈련은 쉴 새 없이 계속됐죠. 이순신은 조선 바다의 특성과 일본 군함의 장단점을 면밀히 분석하여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개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진 장군은 전략적 사고와 선견지명을 보였습니다. 1590년 일본 통신사 사절단의 호위무사로서 참여하여 일본의 역학관계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인지한 그는 황윤길과 김성일에게 임박한 위협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분분하여 통일된 대응을 이루지 못했죠.
도지사로서 동복현 황진 장군은 병사 훈련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조선의 산간 지형을 감안해 게릴라 전술의 필요성을 예상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일본 침략자들과 맞설 준비가 잘 되어 있고 숙련된 군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592년 7월 황진 장군은 이치와 웅치의 전투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업적으로 그는 6위에서 2위까지 8 계단을 오르는 빠른 승진을 이루었습니다. 황진 장군의 군사적 기량과 대의에 대한 헌신이 분명해졌고 동료 병사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압도적인 역경에 직면한 다른 놀라운 용기와 회복력의 사례들과 유사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 같습니다.
1937년 상하이 사행창고에서 2만 명의 일본군에 맞선 524연대 중국군 800명의 용감한 대치,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맞선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의 유명한 예가 떠오릅니다. 마찬가지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 10만 명과 용감하게 싸운 6천 명의 조선군은 깊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참혹한 결과를 직감한 이 병사들은 6만 명의 민간인을 버리지 못하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진주성에 입성했습니다.
비극적으로 9일 간의 저항 끝에 조선군은 전멸했고, 일본군은 진주에서 6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방어군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양측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전쟁의 파괴적인 영향과 자신의 땅을 지키고 민중을 지키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치른 희생을 강조합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4월 진주를 방문했을 때 이곳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남강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지키기 위해 싸운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의 고마움은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채 진주성 야경만 사진에 담았죠.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쉽게 왜곡되고 잊힐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마무리하면
1592-1593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황진 장군의 용맹과 헌신은 우리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합니다. 그들의 전략적 사고와 희생, 그리고 리더십은 한국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업적을 연구하고 역사적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역경의 시기에 개인과 국가의 회복력과 결단력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이 시기에 대한 더 깊은 탐구를 제공하는 두 권의 책은 "임진무쌍황진"과 "이순신의 바다"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이 기록들은 한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육지와 바다에서 등장한 영웅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서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이순신, 육지의 황진 진주성의 영웅들 소개에 관한 글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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